그냥일기 - 210824 - 비와 산책

2021. 8. 26. 23:04일상기록

퇴근하고 건물을 나섰는데 구름이 낮고 넓게 깔려 있어서인지 세상이 온통 조용한 느낌이었다. 바람이 풀과 나뭇가지를 흔드는 스사사삭 소리만 여기저기서 울렸다. 거리도 한산하고, 좀비물에서 혼자 남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센치해져서 My J를 듣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요새 걸어서 퇴근하는 것에 맛들려서 당연히 오늘도 걸으려고 했는데 안개같던 비가 살짝 방울이 되어 내리는 순간 우산을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맞을 만한 비였고 까짓거 좀 많이 맞아도 뭐 어때 하고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몇 걸음 떼는 순간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이걸 다 맞으면서 걷는 건 살짝 오바인데? 그냥 처음부터 셔틀 탈 걸 그랬나? 택시는 절대 안 탈 거야. 버스라도 탈까? 그럼 다음 정류장까지만 걸어가서 버스 타야겠다. 어차피 정류장까지는 금방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이건 무슨 장난인지 다시 비가 잦아드는 것이었다.

그럼 다시 걸어야지 뭐.

며칠 전에 셀프로 운동화 빨래를 하면서 뭐가 망가졌는지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오른쪽 신발에만 물이 흥건하게 들어왔다. 신발은 진작에 포기하고 이렇게 된 김에 비나 마음껏 맞자 했다. 우산이 있었다면 우산에 부딪치는 소리가 소복소복 부드럽게 날 것 같은 비였다. 이것도 그런데 한 시간 넘게 걷다 보니 꽤나 많이 맞았는지 입고 있는 셔츠를 내려다보니 색깔이 바뀌어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그야말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사람이 되었다. 머리도 보니 아주 푹 젖어 보였다. 어쩐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힐끔 보고 가더라. 그렇게 불쌍해 보였나? 나는 재밌었는데 샤워해 샤워 빗물샤워

춥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빗속 산책한 기념으로 집에 와서 레인샤워기로 샤워했다. 엊그제 거품목욕할 때 토수구도 처음 틀었으니 이제 욕실의 모든 새것을 다 이용했다. 떨어지는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서 한참 그러고 있었다. 일종의 명상 같기도 하고, 여러 아이디어들도 떠오르고 마음도 따뜻해져 많은 게 이해되기도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